written by.어싱싱
지루한 목소리가 강의실 안을 맴돌았다. 가만 보면 열심히 듣는 사람도 있고 그러는 ‘척’만 하는 사람도 있고 어찌된 영문인지 자는 사람도 있었다. 아야모는 앞에서 꾸준히 입을 여는 교수의 목소리를 배경삼아 별 의미 없이 펼쳐진 책을 보았다. 팬 촉이 종이 위를 거닐었다. 까만 잉크가 흔적을 남기며 자국을 남기다 갑작스런 진동에 삐딱선을 탔다. 주변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니 익숙한 수신인으로 부터 메일이 와 있었다. 그에 그녀 본인도 모르게 지루한 표정이 무뎌졌다.
「오늘 비와서 로드워크 못해요.ㅠㅠ」
정말로 시무룩해 보일 것 같은 그 문자에 웃음이 났다. 학교 가기 전 확인했던 일기예보에서 말했던 대로 어느 샌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톡톡. 손가락을 눌러 시무룩해 하는 문자를 위로를 보냈다. 한편으론 우산이 없다고 하여 우산 아래를 같이 거닐까 강의 중 남모르게 즐거워하는 아야모였다.
「그래도 배구는 실내 스포츠니까 그나마 다행이네.」
강의실을 메우던 지루한 공기가 두근거림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창가를 두들기던 소리가 반갑게 들려 그녀는 수업 내내 평소 쉽게 보이지 않던 부드러운 표정으로 있었다.
아스팔트 바닥을 마주해 톡톡 사방으로 튕기는 빗방울이 이곳저곳, 온갖 곳에 제법 물웅덩이가 생겼다. 비가 내려 습한 공기 중에도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진동의 떨림이 전해져 와 해가 질 때까지 내리던 비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는 그녀였다. 머리 한 구석에서는 그녀의 손에 쥐어진 핸드폰에서 아침부터 꾸준히, 왕왕 울어대던 남자의 존재를 떠올리면서도 애써 외면했다. 어리광부리던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저절로 그려져 쓰다듬어 주기라도 하면 토라질까 웃음이 나는 것도 보일 리 없음에도 혼자 숨죽여 웃었다.
늦은 시간 까지 이어진 강의에도 어수선한 분위기로 학생들이 몰렸다. 점점 약해지던 빗줄기가 줄어들더니 마냥 어둡기만 하던 하늘에서 설핏 저녁노을이 비추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몰려가던 무리에서 저마다 한 마디씩 튀어 나왔다.
“3시간 꽉 채울 줄 정말 몰랐어…….”
“배고픈데 밥이나 먹으러 갈까?”
앞서가던 동기들의 입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음식이름들이 튀어 나왔다. 그래 뭐 먹으러 가자! 먹고 죽는 거야! 따라 우스꽝스러운 구호를 외치며 건물 입구까지 왔을 때였다.
“아악! 우산 두고 왔어!”
아야모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가 오는 걸 보며 복도를 걷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우산의 존재를 잊은 자신을 타박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앞서 걸어가던 동기들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겉으로 보기에 찬바람 불고 다가서기 어렵게만 보이던 그녀들의 친구에게 가끔 이런 실수라 하기도 민망한, 그런 일이 생기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놀려댔다.
“덜렁이네. 아야모상~”
“덜렁이네― ”
아악!! 단말마를 외치며 어찌할 줄 몰라하는 그 모습에 그녀들은 더더욱 아야모를 놀려댔다. 그녀들은 이젠 아예 우스꽝스러운 곡조를 붙여가며 그녀를 놀리다 적당히 끊고 깔깔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미안! 먼저 가. 우산 찾고 갈게.”
“이왕 그렇게 된 거 체육관에도 가봐 아야모 쨩.”
“롤링- 썬더!”
팡팡 펼쳐지는 우산을 쓰고 웃으며 빗속으로 걸어갔다. 그녀들은 내일봐-! 라며 아야모를 실컷 놀리다 못해 그녀 얼굴에 불그스름한 노을빛하나 그려주며 떠났다. 먼저 가는 동기들에게 인사하곤 그녀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나서며 열었던 문을 열고 다시 들어가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럿 있던 강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지막이 비가 내리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장난치듯 삼삼오오 지나가는 말소리가 들렸다. 아야모가 앉았던 자리로 다시 돌아가 보니 그 자리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우산은 없었다. 주황색에 검은색 손잡이인 우산. 그녀가 앉았던 앞, 뒤 강의실의 구석구석을 둘러보아도 우산의 행방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그 잠깐 사이에 사라졌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그녀는 여전히 내리고 있는 비에 당황스러웠다. 오전보다는 빗줄기가 많이 약해졌다지만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동기들은 이미 먼저 보냈던 불과 수분전의 자신을 뜯어 말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아야모였다. 그러다 손아귀에서 정적을 깨는 진동소리에 화면을 보았다.
「누나 수업 끝났어요?」
「으어엉ㅠㅜ 유우ㅜㅡㅜㅠ 우산 없어ㅠㅜㅠㅠㅡㅜㅠ 어떡해ㅠㅜㅠㅠ어아ㅠㅠ」
「데리러 갈게.」
그저 평소처럼 연락이 온 유우에게 아야모는 그저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몰라 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바로 뒤 날아온 답장에 우산에 대한 당혹감이 일순 사라지는 아야모였다.
‘……? 어? 응……? 유우 배구, 연습 있는 날 아닌가? 응……?????’
「입구에서 기다려요.」
즉답으로 하나 더 날아온 답장에 아야모는 화면이 도로 어두워질 때 까지 핸드폰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저 마지막 문장을 되새기며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입구로 향했다. 향하면서도 그의 일정을 잘 아는 그녀로써는 오늘 있다고 생각한 연습을 떠올렸다. 그토록 좋아하는 배구인데 거기에 연습중이 아니었나? 연락을 괜히 한 걸까? 꺼졌다 다시 켜지는 화면을 보아도 마지막 답장은 그대로였다. 천천히 와도 괜찮다는 답장을 보내야 할까 고민을 하는 그녀는 다시금 어두워진 화면을 켰다. 액정 위를 배회하는 손가락을 움직여 몇 자 쓰다가도 다시 지우기를 반복했다.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는 바람이 차가웠다. 비가 약해졌다 해도 여전히 습하고 찬바람이 불어 건물 입구에도 조금 들이쳤다. 아야모는 핸드폰에 시선을 두다 등 뒤로 누군가 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겠거니 신경을 쓰지 않으며 그녀는 다시 까만 화면을 건드렸다. 시간을 보니 겨우 5분 지나있었다. 한 10분 있으면 오려나, 생각을 하던 중 그저 지나가는 줄 알았던 사람이 그녀를 불렀다.
“저요?”
“어라, 아야모 아닌가?”
아야모는 핸드폰을 쥔 손을 든 채로 남자를 바라봤다. 언뜻 기억 날듯 말듯 한 기억에 입이 먼저 나갔다.
“어, 만난 적 있었던가?”
“뭘, 그리 섭섭하게 모른 척 하고 그래?”
친근한 척 다가오는 태도에 아야모는 한 걸음 물러났다.
“정말 기억 안나? 이 오빠 섭섭해~ 전에 팀플 때 같이 했잖아~”
그 말에 작년 이 맘 때쯤 겪었던 것이 떠올랐다. 아. 그 망할.
“아, 잘 기억이 안 나서요. 저 이만 가볼게요.”
“에헤이, 어디가게? 누구 기다려? 우산 없으면 오빠랑 쓰고 갈까?”
“아뇨, 필요 없어요. 데려온다고 해서.”
아야모는 그대로 핸드폰을 키고 유우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다. 빠르게 건물 뒤 쪽에 있겠다는 문장이 막 완성 되려던 차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추근덕거림에 애써 무시하면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이게 진짜! 좀 좋게 좋게 해주려니까 뭔데 무시하고 지랄인데?!”
“뭐하는……!”
우악스럽게 잡힌 손목에 뒤를 돌아보니 예의 그 남자가 험상궂은 얼굴로 서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은 액정에 금이 가 있었다. 여전히 붙잡힌 손목은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악스럽게 잡혀 있었다. 비가 내리는 소리만이 들리는 정적 사이로 느껴지는 두려움에 입안을 깨물었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거 놔!”
“시끄러! 괜히 힘 빼게 튕기지 말라고!”
태연한 척 하고 있는 그녀도 점점 힘에 부쳐왔다. 어쩌지? 여전히 빗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쿵쿵거리며 울리는 것이 머릿속인지 실랑이를 벌이는 소동 때문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서늘한 공기가 뺨을 스쳤다.
“놓으라잖아.”
무자비하게 잡혀져 있던 손목이 자유로워졌다. 익숙한 품. 익숙한 목소리.
“유, 유우?!”
고개를 들려 하는 아야모의 머리를 꾹 누르자 가슴팍에 코가 닿았다. 코끝을 스치는 유우의 향이 간질거렸다. 젖은 옷자락 너머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모른다는데 왜 자꾸 그래요?”
“이익……! 뭔데! 넌!”
여전히 가슴팍에 파묻혀 있는 아야모를 확인한 유우는 남자의 손을 더욱 새게 비틀었다. 새파랗게 질리던 얼굴이 불성 사납게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며 유우는 이를 악물었다.
“아야모한테 얼쩡거리지 마.”
내던지듯 풀어준 팔을 문지르던 남자는 도망치듯 빗속으로 뛰어갔다. 여전히 품안에 있는 그녀를 보다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조금만 더 일찍 올 걸.
“누나 괜찮아요?”
아야모는 다독이는 유우의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보니 예의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달려가는 소리가 들린 것으로 봐서 도망간 건가 싶어 유우를 다시 돌아봤다. 저조차도 위압되어 꼼짝도 못 했던, 목소리만으로도 무섭게 으르렁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손목을 문질러 주는 풀죽은 모습만 보였다. 그 얼굴을 보니 아까까지 느끼던 공포감은 어느 새 자취를 감추고 안도감이 몽글몽글 솟아나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부턴 그런 자식 보면 뺨이라도 한대 쳐버리란 말임다!”
“그러는 유우야말로 우산은 어쩌고 다 젖어 있는 건데? 그리고 무턱대고 그러다 찍히면 어쩌려고?!”
그리고 뺨이라니, 겨우 그 정도로 될 거 같아? 마주친 시선에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괜찮아, 괜찮아. 그나저나 우산은?”
“아 우산……!”
두 사람은 건물 입구 밖을 덩그러니 돌아다니고 있는 우산을 보다 발치에 치인 핸드폰을 보았다. 두 사람의 핸드폰이 나란히 금이 간 액정을 과시하며 까만 화면을 보여주었다. 여전히 쏟아지는 빗소리에 둘은 그저 실없이 웃음이 흘렀다. 이게 뭐람. 그래도 겉모습은 멀쩡해 보이는 우산을 주워들자 댕강 반으로 고꾸라졌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우산이라도 사러 갈까요?”
여전히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유우가 물었다. 아야모는 웃느라 눈물이 난건지 눈가에 맺힌 듯 한 눈물을 닦아내며 그러자고 대답했다. 걸치고 있던 져지를 벗더니 그네들 머리 위로 씌웠다. 가까워진 얼굴에 바로 앞에 가득 채워진 서로의 눈에 웃음이 났다. 빗속에서 참방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