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왕이 하사한 제국 최고 마검사, 니시하라 아야모.
선왕의 이른 승하로 지지가 불안정한 어린 왕, 니시노야 유우.
그 틈을 노린 공작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민심을 업은 공작군은 물밀듯이 왕성으로 진격했다. 왕이 어떻게 손을 쓰기도 전에 공작은 그의 지지자를 통해 무혈입성. 순식간에 왕성은 함락되었고 왕은 급하게 비밀통로로 도망간다. 그 과정에서 많은 호위기사들이 죽고 두 사람만 남아 겨우겨우 추적을 떨어트리고 외국으로의 도주에 성공한다.
두 사람이 외국 변두리의 작은 마을에 정착해서 생활의 기반을 잡고 마을 사람들 사이에 어울려 살아갈 무렵에 두 사람의 나라는 공작의 통치 아래 이전보다 더욱 강하고 부유한 나라로 발전했다. 선왕은 사치와 향락에 물든 사람이었고, 나라의 빈부격차는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유우는 그것을 바꿔보고자 하였으나 어린 그를 얕잡아보고 오히려 제 입맛대로 다루고자 했던 신하들 때문에 제대로 뜻을 이루지 못 하였다. 민심은 점점 흉흉해져갔고 공작은 그 틈을 노린 것이다. 제가 다스릴 때보다 훨씬 나은 나라의 모습에, 유우는 예전의 삶은 그대로 버리기로 결심한다. 아야모는 자신의 왕이 안타깝지만 자신은 이미 그에게 충성을 멩세한 몸. 그의 것이기 때문에 그의 의지를 따른다.
둘 다 귀한 신분이어서 생활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순박한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활을 꾸려갔다. 두 사람은 숲 속의 오두막에서 나뭇꾼으로 일하며 살았다. 평민과는 달리 눈에 띄는 고운 외모를 숨기려면 최대한 숨어살아야 했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지만 상단도 가끔 들리는데다가 다른 마을과의 교류도 있기에 사람들의 입소문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결국, 정보가 새어나가 공작의 정통성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몇몇 귀족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와서는 다시 왕이 되어달라 간청한다. 물론 마음을 굳게 먹은 상태였던 유우는 거절한다.
나는 이제 그 나라의 왕족이 아니라 이 나라의 평민으로 살기로 결심했소. 돌아갈 생각은 없소.
백성들을 버리시나이까! 고통받고 있는 왕국의 시민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전하!
고통받고 있다고? 옆 나라의 변두리, 작은 마을인 이 곳에서도 그의 통치력을 인정하고 있네. 그는 이미 왕국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지 않았는가! 나는 그만큼 잘 할 자신도 없거니와, 내가 세를 모아 내란을 일으키는 것이 과연 진실로 백성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시간은 늘 흘러가고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이지. 나는 도망친 비겁한 왕이고 니시노야 왕조의 마지막 사람이 될 것이오. 또한 나는 그것이 그리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소.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지. 새로운 물길을 터 썩은 물은 완전히 흘려보내야 깨끗해질 것 아닌가.
나는 그대들의 왕이 아닐세. 필부일 뿐이야.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말게.
그리고 귀족은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공작에게 위험분자로 인식된 감시대상이었다. 감시자를 통해 공작에게 유우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고, 선왕의 유품이자 니시노야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반지를 노리는 공작에 의해 다시 두 사람의 도주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어디로 도망갈까... 후줄근한 평민 옷. 후줄근한 짐들. 생활 안정에 거의 다 써버린 패물들. 살림살이들을 급하게 처분하고 받은 얼마 되지 않는 돈. 그리고 아야모의 마법검과 유우의 연습용 검. 그게 그들이 가진 전부였다. 부족한 돈에 그들은 노숙하기가 일쑤였고 암삼자들은 깊은 밤에만 찾아왔다. 그렇게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도주하는 생활이 계속 이어지자 둘은 점점 지쳐갔다. 처음 도망칠 때와는 달리 암살자들은 더욱 집요했고 그들은 목적지를 잃고 희망을 잃었다.
그래도 유우만은 지켜야한다고 삶의 목적을 다잡는 아야모와 달리 유우는 그런 아야모에게 죄책감도 느끼고 점점 삶을 이어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날 밤, 유우는 아야모가 호신용으로 검술을 가르쳐주며 사주었던 검으로 자살시도를 하고 간발의 차로 눈치챈 아야모가 겨우 막지만 상처는 곪아 터져버렸다.
내가 살아 무엇한다고! 나만 없으면, 나만 없으면 너도 자유로운 몸이 되지 않느냐! 너의 실력이라면 어디든 환영받을테다. 이 나라의 왕에게 찾아가도 좋고, 공작에게 충성을 바쳐도 좋겠지. 번영해가는 왕국의 제 1 기사로써 평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자유로이 떠도는 용병이 되어도 좋겠지. 나만 없으면!! 나는 너에게 족쇄일 뿐이다. 내가 너에게 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너는 왜 내 곁에 있는게냐. 너에게는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지켜야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내가 사는 이유를 이 세상에서 찾을 수가 없어….
절규와도 같은 그 외침에, 그를 이은 작은 흐느낌과 같은 말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아야모는 그가 무너졌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어른스럽고 아무리 현명하여도 그는 아직 어렸다. 짧지 않은 침묵 끝에 드디어 아야모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를 위해 사십시오. 제가 당신을 지키는 이유가 없다고 하셨습니까? 제가 당신을 지키는 이유는, 당신이 제 삶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저도 이 세상에서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선왕의 명령 때문이 아닌, 제가 스스로 판단한 것입니다. 제 모든 것은 당신을 위해 있습니다. 당신은 족쇄따위가 아닙니다. 당신은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는 닻과 같습니다. …사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면, 저를 위해 살아주십시오. 제가 살 수 있게, 살아주십시오.
충성보다 더 강한, 연모보다 더 질긴, 서로가 삶의 이유가 되어 의지하고 나아가 결국 변방의 작은 공국, 그 안에서도 바다가 보고 싶다는 유우의 작은 소망에 의해 바닷가 시골 마을에 정착해 살다가 아이도 낳고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P.S.1 : 맨날 반역자를 처단하라! 내가 정통 왕이다! 이런 내란만 일으키는거 보다가 그 강직한 마음으로 깔끔히 포기를 해버리는 유우가 보고 싶었다.
P.S.2 : 아야모가 처음 왕국 제 1 기사가 되어 왕자에게 하사되었을땐 완전 똥 씹은 기분이었을 것. 겨우 노력해서 제 1 기사가 되었는데 바로 왕자에게 소속되다니. 이쁘장한 인테리어 소품이 되어 왕자만 졸졸 따라다닐 것이 분명해서 처음에는 정말 예만 갖춰 대했을 듯. 그러다 유우와 가장 가까이서 지내니까 점점 알아가고 존경이 되었다가 연모가 되고 삶의 이유가 되고... 그랬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유우가 자살시도를 했을 때 누구보다 마음이 아팠고 죽고 싶었을 듯.